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일례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61輯
발행연도
2018.7
수록면
35 - 65 (31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집안고구려비와 광개토왕릉비가 제작된 시기, 왕릉의 수묘인이 매매되었던 배경에는 수묘인이 담당하였던 업무와 연관되었을 것으로 이해하였다. 해당 시기 수묘인의 업무는 왕릉인 적석총 축조와 정비, 묘역에서의 四時祭祀, 묘역 洒掃와 같은 것들이었다. 광개토왕 이전 수묘인은 국내성 원근에 거주하는 舊民만을 선발하였다. 舊民의 거주 지역은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 영역으로 서쪽으로는 요동 이동, 북으로는 송화강 이남, 남쪽으로는 평양 이북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특히나 요동 이동 지역은 이른 시기부터 주변 이민족과의 잦은 전쟁에 시달려왔다. 광개토왕대에서 멀지 않은 고국원왕 12년에도 前燕의 모용황이 남녀 5만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다. 舊民 5만이 유출된 대사건으로 舊民의 수적인 감소는 결과적으로 수묘를 담당할 백성들의 쇠퇴를 초래하였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광개토왕이 수묘인 매매 금지령을 발령하기 전, 富足之者는 왕릉의 수묘인까지도 매매할 정도였다. 국내성 주변에는 한 변의 길이가 25m가 넘는 초대형급 적석총이 최소 37기 이상이나 있다. 그리고 한 변의 길이가 15m가 넘는 대형급 적석총은 최소 60기 이상이다. 왕릉과 동일한 규모의 초대형급 적석총을 축조할 수 있는 세력은 당대 최고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갖는 계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집안고구려비와 광개토왕비에 富足之者라고 지칭된 계층은 적석총을 묘제로 채택하면서 또한 정치적, 경제적으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던 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왕실의 大加만이 칭할 수 있는 古鄒加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3세기 후엽까지도 독자적인 종묘제사를 거행하였던 세력으로 소노부가 있었다. 엄연히 계루부 왕실이 집권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前 왕실세력인 소노부의 종묘제사가 용인되었다. 소노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는 것과 왕권을 정점으로 한 배타적인 제사제도가 미확립되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소노부의 토착지인 졸본은 지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해당한다. 졸본은 요동을 경유하여 오는 이민족을 방어하는 요충지이며 또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시조묘가 위치한 곳이다. 그래서 중요한 시기 고구려 왕들은 졸본으로 직접 가서 시조묘에 제사하고 국가적 통합을 도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소노부의 위상과 졸본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에 근거할 때, 4세기말까지도 거대한 적석총을 축조하고 수묘인을 두어 독자적인 제사를 지냈던 富足之者의 하나로 소노부의 大加가 유력하다고 판단하였다.
4세기말, 광개토왕은 수묘인 매매 금지령을 발령하고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한 형벌을 경고하였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前 왕실세력인 소노부의 종묘제사가 유지되고, 諸加세력들이 합의하여 형벌을 부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광개토왕대 왕권이 강화되면서 富足之者라고 불려졌던 세력들을 강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던 시대적 배경이 담겨있다고 파악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수묘인 매매 금지의 배경
Ⅲ. 수묘인 매매 금지령의 의의
Ⅳ. 수묘인 매매 세력 富足之者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93)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