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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은상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87호
발행연도
2022.4
수록면
73 - 94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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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식민지 조선 북부지역 화교에 관한 일련의 연구 중 하나로 배화폭동 이전 평양화교의 실태를살펴보았다. 우선, 평양의 지역적 특징과 화교의 규모를 서술하였다. 평안도의 전통적 상업중심지 평양은 진남포 개항2년 뒤 개방되었다. 경의선 개통은 평양의 도시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평양은 1910년대 후반부터 공업도시로 주목받았는데, 중소공업 분야에서 조선인의 상공도시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은 평양화교의규모에 반영되었다. 다음으로, 평양화교의 경제력을 분석하였다. 1920년대 평양화교의 구심점은 직물수입상이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평양은 조선인 중신조합을 통해 화교직물도매상과 조선인 직물소매상 간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평양직물업계에서 화교직물상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또한 평양의 화교상인은 조선 북부지역 화교상인 네트워크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신의주에서 화교제조업자가 생산한 양말은 이들을 통해 전국에 유통되었다. 잡화도매상 경흥덕(慶興德)의 경영자는 1920년대 중반 조선인 양말제조공장에 자금을 융통해줄 정도의 유력 상인으로, 별도의 양말제조공장을 운영하면서 경영의 다각화를 꾀했다. 마지막으로, 평양의 화교조직으로 중화상회를 검토하였다. 평양의 화교조직은 평양이 개방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이후 상회법(商會法)에 따라 중화상회로 개칭되었고, 신(新)상회법에 따라 위원제(委員制)로 개조되었다. 1919년 중화상회 임원 명단을 살펴보면 직물상, 잡화상이 대부분이고, 화농(華農)이 포함되었다. 1930 년 명단에서는 직물상과 잡화상 외에 주물업자와 요리업 경영자의 약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폭동 이전화교사회의 주류로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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