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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준형 (서울시립대학교)
저널정보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서울학연구 제88호
발행연도
2022.8
수록면
67 - 107 (41page)
DOI
10.17647/jss.2022.08.8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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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재조일본인 2세에 해당하는 사토 도시오의 『타국의 고향』이라는 회고록을 통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평양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의 거주 환경 및 도시 구성의 변화와 그에 따른 도시 경험의 차이를 밝히고자 했다.
1899년에 평양은 외국인들과의 성내 잡거를 전면 허용하는 개시장으로 개방되었다. 일본인들은 주로 내성의 조선인 시가지, 그 중에서도 상업의 중심지인 종로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사토 도시오의 아버지인 요시헤이 또한 내성의 이문리라고 하는 곳에 가게를 열고 조선인 상대로 장사를 했다. 그를 위해 한국어 공부에도 적극적이던 요시헤이지만, 그럼에도 장사 외에 조선인과의 접촉은 극히 드물었다. 도시오 또한 동네 조선인 아이들과 교류는 없었으며 오히려 조선인으로 둘러싸인 잡거 환경에 이질감을 느꼈다.
러일전쟁은 평양의 도시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일본군 기지 건설과 함께 중성 및 외성 일대에 일본인 시가지가 새롭게 건설되었다. 이와 함께 평양 내성의 기존 시가는 구시가로 불리게 되었으며, 요시헤이 일가를 비롯한 내성의 일본인 다수가 신시가로 이주함에 따라, 잡거지로 시작했던 개시장 평양에서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 지역이 구분되는 식민지도시의 이중도시적 성격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본인 중심으로 건설된 신시가에서는 ‘내지’의 재현이 시도되었다. 그것은 조선인과 무언의 반목을 야기하는 동시에, ‘내지’가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였다.
3.1운동 이후 중학생이 된 도시오는 일본인 시가를 벗어나 미답의 땅에 대한 ‘모험’을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도시오는 서양의 풍경을 재현한 듯한 선교사촌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조선인 시가도 일본인 시가도 아닌 그곳을 그는 ‘별세계’라고 불렀다. 더구나 조선인 상류층 거주지를 발견하고서는 평양의 중심이 일본인 시가가 아님을 깨달았다. 도시오에게 있어서 ‘별세계’는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 일본인 사회의 바깥 그 자체였다. 그 점에서 일본인 사회야말로 식민지 조선의 ‘별세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평양에서 배포된 3.1독립선언서의 귀환
Ⅱ. 구시가: ‘잡거’ 공간 속 무언의 반목
Ⅲ. 신시가: 재현된 ‘내지’
Ⅳ. 서양촌: 식민지 조선의 ‘별세계’
Ⅴ. 맺음말: ‘생과 사’의 경험이 낳은 식민지관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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