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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안주홍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52호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335 - 36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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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문왕대에 벌어진 태종 묘호 논쟁의 시점, 주체, 원인을 밝힌 글이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묘호 논쟁은 692년(신문왕 12)에 벌어졌다. 690년에 측천은 무주혁명을 일으키고 주 태묘인 무씨 7묘를 건립하였다. 그에 따라 당 태묘는 3묘의 향덕묘로 격하되었다. 이에 측천은 안으로는 당 태묘의 격하에 관한 당 종실과 관료집단의 불만을 해소하고, 밖으로는 주 중심의 국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묘호 논쟁을 제기하였다. ‘중종의 구칙’이라는 방식으로 제기하였는데, 이씨 종묘의 문제이므로 이씨인 중종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신라 중대 왕실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측천의 요구를 거절했다. 하나는 일통삼한을 왕조의 정당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측천이 대신라외교에서 온건적인 입장이라서,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태종호를 고수함으로써 혜공왕대와 애장왕대의 종묘 개편에서도 일통삼한 의식을 유지, 환기할 수 있었다.
한편 태종 묘호 논쟁은 신라 내부에서 전승되면서, 『삼국유사』의 형태로 확장, 변형되었다. 다음 세 가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당 고종이 김유신을 33천인으로 인정한 점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당 태종의 현신으로 위징과 이순풍을 꼽은 점이다. 위징은 706년에 당 태종의 배향공신이 되었는데, 바로 전해에 중종이 복위하여 당 태묘를 복원하였다. 이순풍은 당 태종의 자손이 측천에게 전멸당할 것을 막은 일화로 유명한데, 이 일화의 원전은 9세기의 것이다. 위징과 이순풍은 모두 ‘무주혁명으로 인한 당 황실의 시련’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역으로 묘호 논쟁이 무주혁명과 관련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681년설과 재론설 비판
Ⅲ. 692년설의 재검토와 허구설 비판
Ⅳ. 논쟁의 주체와 원인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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