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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일규 (국민대)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51호
발행연도
2021.4
수록면
77 - 103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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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 왕실과 연고된 궁예의 정치적 입장이나 사상을 가늠해보기 위해서 당시 신라 사상계의 동향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신라 말 신라인들은 불사를 설행하여 말법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였다. 국왕, 왕족, 승려, 지역민 등은 신분의 구분 없이 정토의 도래와 왕생을 기원하고자 서남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교통이나 군사 요충지 등지에서 불사를 설행하였다. 특히 말법의 혼란은 석가모니의 말씀과 실천을 온전히 따라야 수습할 수 있었고, 미륵의 강림으로 현실에서 구원받으려는 욕망 역시 정법의 온전한 구현을 필요로 하였으므로,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을 강조하였다. 다만 석가정토 복원이나 미륵정토 도래는 현실을 개혁하는 전륜성왕에 의해서 가능하였기에,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칭하면서 미륵정토는 물론 석가정토를 이끌 주체로 나섰다.
신라 말에는 선종 불교의 성행과 함께 교종 불교도 변화하였다. 다만 궁예가 세력을 일구었던 명주 일대에는 선승이 활동을 중단하였다가 재개하지 않았고 화엄사찰도 분포하지 않았다. 이전부터 명주에는 진표의 법상종 사상이 영향을 미쳤다. 자연히 궁예가 출가한 세달사는 화엄 사찰이었지만, 낙산사 관음신앙이나 진표의 미륵신앙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궁예는 당시 선승이 사회 혼란을 제압하고 새 사회를 이끌 미륵 강림의 주체로 강조되었기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철저히 배제하였다. 또한 의상과 진표 이래 당시 교섭하였던 화엄사상과 유식사상, 선종사상은 점차 배제시킨 채, 그 사상에서 강조한 신앙만을 중심으로 나름의 교설을 정립하고 강조하였다.
신라에는 일찍부터 유교와 불교를 함께 이해하려는 경향이 자리하였고, 신라 말에도 효도와 추복을 동일시하는 인식이 상존하였다. 궁예는 휘하에 유학적 소양은 물론 불교사상과 비기, 천문, 복서에 능한 호족 출신 지식인을 중용하여 국가 운영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911년에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고 왕권의 전제화를 추구하면서 신라의 것을 계승한 휘하 지식인을 점차 배제하였다. 그는 말세의식이 만연한 당시에 신라에서 전승된 유불교섭 경향이나 고유 정서를 인정하지 않고, 선종사상, 화엄사상, 유식사상 등도 배제하면서 자신만의 사상과 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하려고 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말세의식의 만연과 정토불사의 설행
Ⅲ. 선종 불교의 흥기와 교종 불교의 변화
Ⅳ. 유불의 교섭과 고유 정서의 강조
Ⅴ. 맺음말
참고문헌
日文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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