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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호철 (충북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74
발행연도
2014.6
수록면
5 - 29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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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신라 말의 혼란 속에서 단순히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사회건설을 목표로 내세웠다. 그는 민심의 수습과 호족세력의 통합에 성공하여 후백제를 건국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후삼국통일과 고구려의 옛 영토 수복을 꿈꾸었다.
견훤의 후백제 건국은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의 모델이 되었다. 견훤의 후삼국통일과 고구려 구토 회복의 꿈은 왕건의 고구려 계승과 西京중시 등 북방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그에 맞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수립하였다. 그 하나가 백제계승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미륵신앙을 통한 이상 사회의 실현이었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민심을 끌어들이는 정치이념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당시 호남지역 주민의 정서에 맞는 새로운 정치이념이었다.
견훤은 외교에도 민첩하였다. 대외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상황에 따라 명분과 실리를 추구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관계를 실현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국제질서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등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여러 가지 한계도 있었다. 견훤은 우선 구체제를 극복하는데 실패하였다. 그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견훤의 역사인식의 이중성에 있었다. 자신이 백제계승자로서 백제부흥과 삼한 통합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 왕실에 대한 ‘尊王의 義’를 강조하였다. 견훤은 자신의 출생설화를 통해 백제 계승자임을 정당화하면서도, 반면에 자신의 先代를 신라 왕실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즉 자신의 계보를 진흥왕의 5대 손으로 신라왕족의 직계 후손에 연결시킨 것은 백제계승자임을 표방했던 정치이념과는 이율배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견훤의 역사인식의 이중성은 신라와의 대외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즉 견훤은 한편으로는 후백제왕을 칭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의 군신임을 자임하고 있었다.
견훤은 미륵신앙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과 결합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지만, 호족세력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는 자신의 초기 세력기반인 광주 호족과 천도 후 등장한 전주 호족 간의 대립을 막지 못하였다. 특히 나주를 비롯한 서남해 일대의 해상세력이 견훤에게 등을 돌린 것은 후백제 성장의 결정적 약점이었다.
후백제의 한계는 對중국?일본외교에서도 나타난다. 후백제는 吳越과 後唐과의 외교에 앞장서서 후삼국 중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들로부터 받은 직함에는 ‘百濟王’과 함께 ‘신라서면도통’이라는 명칭이 함께 나온다. 일본과의 외교에서도 비슷하였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후백제 사신을 ‘新羅人’이라고 하였고, 견훤을 가리켜 ‘新羅 陪臣’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는 후백제를 독립된 국가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후백제의 관부나 관직 등의 내용에서도 그 성격 및 한계를 찾을 수 있다. 즉 후백제는 백제의 정치제도를 계승하지 않고 오히려 신라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하였다. 후고구려가 독자적인 행정체계를 갖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후백제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정치 · 사회적 성격
Ⅲ. 사상 · 문화적 성격
Ⅳ. 대외적 성격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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